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가 지난 8월 15일 개봉했습니다. 공상 과학 영화는 한국에서 썩 인기있는 장르는 아니지만 꿈, 마술, 우주와 같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해석하여 영화적 미장센으로 감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낸 그의 영화는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 중 2014년 작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를 건축가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려 합니다. 이 영화는 꿈 속의 세상을 설계하는 건축가가 등장하는 ‘인셉션(Inception, 2010)’이나 시뮬라르크(simulacre) – 시뮬라시옹(simulation)을 떠오르게 하는 ‘프레스티지(Prestige, 2006)’에 비해 건축적 특징이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스토리가 전개되는 주요한 장소에서 공간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이다스캐드가 들려주는 M칼럼!!
'심쿵건축' 황남인 건축가의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건축이야기
필진. 건축사 황남인
한국 건축사
원주시 공공 건축가
유튜브 '심쿵건축' 채널 운영
내러티브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대표
목차
01. 만남과 비밀의 공간, 책장
02. 식량이자 장애물인 옥수수 밭
03. 공간의 건축적인 상대성
04. 우주 정거장의 건축
그림 1 영화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의 포스터 © Universal Pictures
01. 만남과 비밀의 공간, 책장
그림 2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의 포스터 © Warner Bros.
인터스텔라를 본 관객에게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단 하나의 공간을 꼽으라 한다면, 모두 머피의 방 한 구석을 차지하는 책장을 고를 것입니다. 주인공 쿠퍼가 가장 사랑하는 딸 머피의 책장은 테서랙트(Tesseract)를 통해 차원을 너머 두 사람을 연결하는 접점이 됩니다.
그림 3 만남의 클리셰로 사용되는 책장 너머의 눈맞춤. Midjourney 제작.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책장은 흔한 만남의 클리셰(Cliché)로 사용됩니다. 책장 한 칸의 규격이 얼마일까요? 그 폭은 다양하지만 깊이는 280 mm, 높이는 360 mm로 A4 사이즈의 책자가 무리 없이 들어가는 크기입니다. 책을 쉽고 뺄 수 있어야 하기에 종이 사이즈보다 여유를 두고 제작됩니다. 또한 시판되는 일반 서적의 크기인 신국판은 대게 가로 152 mm, 세로 225 mm이기 때문에, 책장에 책을 꽂아도 책 너머의 공간이 벽이 있든 없든 보이게 됩니다.
그림 4,5 (위) 5차원을 3차원의 공간으로 재구성한 테서랙트(Tesseract) © Warner Bros.
(아래) 잔뜩 쌓여 수직, 수평의 평행선을 만드는 책 © lithub.com
여기서 책장이 일반적인 수납장과 다른 점은 바로 책이 만드는 반복적인 평행선(Stripe)입니다. 책을 세로로 꽂아 놓거나 혹 수평으로 쌓는다면 수직, 수평의 평행선이 생기게 됩니다. 영화 속 ‘유령’ 쿠퍼는 이 책들의 리듬을 이용하여 머피에게 모스 부호로 메시지를 보냅니다. 5차원의 공간을 3차원으로 재구성한 테서랙트는 바로 이런 책장의 비주얼 모티브를 통해 디자인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 6,7 다양한 루버 사용의 예시
(위) Signal Box by Herzog & de Meuron, Basel, Switzerland © Herzog & de Meuron
(아래) Gates Hall by Morphosis Architects, Ithaca, N.Y., United States © Morphosis Architects
건축적인 요소로서 비슷한 장치로는 파사드에 자주 설치되는 루버(louver)가 있습니다. 루버를 통해 외부의 시선을 일부 차단하고, 과도한 일사를 막으며 적당한 빛을 내부로 받아들입니다. 밖에서 건물을 바라보는 입장과 달리 건물 내에서 밖을 바라볼 때는 창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데 이 때문에 루버가 있음에도 외부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책장 역시 누구나 책의 제목을 읽기 위해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고 이것이 예상치 못한 책 너머의 만남을 시작하는 장치가 됩니다.
그림 8 카펜스트리트(Carpenstreet) 오피스 인테리어 프로젝트.
라운지로 향하는 비밀스러운 입구를 위해 책장과 같은 도어를 디자인하였다. © Narrative Architects
책장은 그 설치 방법에 의해서도 종종 비밀을 숨기는 영화적 장치가 되곤 합니다. 겉보기엔 일반적인 책장이지만 사실 뒤편에 비밀 공간이 있고, 책장의 일부는 회전하는 도어인 경우가 많은 영화에 등장합니다. 저도 스타트 업의 오피스를 설계하며 재밌고 비밀스러운 입구를 만들기 위해 적용했던 방법입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오는 커다란 책장은 만일의 경우 쓰러질 것에 대비하여 벽에 고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장 뒤편의 공간은 늘 막힌 벽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예상치 못한 문으로 등장할 때 의외성에 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됩니다.
그림 9,10 머피의 방 책장에서 중력 이상을 느끼는 장면. 우리는 그것이 방 내부의 일이지 책장 너머의 무엇에 의한 현상이라 전혀 예상할 수 없다. © Warner Bros.
영화 속 ‘유령’에 의해 책이 한 권 한 권 떨어져 나오고, 중력 이상 현상이 책의 그림자에 의해 생겨날 때도 우리는 그것이 방 내부의 일이지 책장 너머의 무엇에 의한 현상이라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책장 너머 5차원의 공간이 있고 심지어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은 바로 미래의 쿠퍼라는 사실이 관객에게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큰 반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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