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튼 서울 호텔이 22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대건설과 이지스 자산운용에 지난 2021년 매각되어 기존 건물은 곧 철거되고, 2027년을 완공을 목표로 오피스와 호텔, 상업시설 등의 복합용도로 신축 예정이다. 12월 영업 종료를 앞두고 동료 건축인들의 SNS에는 힐튼호텔 방문 인증샷이 올라왔고 ‘나도 늦기 전에 꼭 한 번 가보아야겠다’ 정도의 행복한 결심으로 힐튼 서울 호텔을 방문했다. 힐튼 서울 호텔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느껴지는 감정...그리고 사라지는 건축물을 바라보는 건축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적어보았다.
마이다스캐드가 들려주는 M칼럼!!
'심쿵건축' 황남인 건축가의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건축이야기
필진. 건축사 황남인
한국 건축사
원주시 공공 건축가
유튜브 '심쿵건축' 채널 운영
내러티브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대표
목차
01. INTRO
02. 굿바이, 힐튼!
03. 힐튼에 가다
04. 가장 쇼킹한 이야기
05. 준공 후의 짝사랑
06. 건축가와 작품의 관계
07. 건축가의 숙명
08. 백점짜리 도시
09. 불변의 가
01. INTRO
97년 10월 27일 밤 김종필의 서울 청구동 자택. …… 1년6개월 남짓 끌어온 DJP (김대중-김종필) 연합이 바야흐로 대미를 장식하는 순간이었다. …… 청구동 회동의 공동 연출자는 한광옥과 김용환이었다. 두 사람은 하루 전인 10월 26일 힐튼호텔에서 마주앉았다. 최종 합의서 작성을 위한 마지막 담판이었다.
백기철, “정권교체 - 그 숨가빴던 순간들”, 「한겨레」, 1998년 1월 5일
11월 23일 국제통화기금(IMF)실무협의단이 서울로 날아왔다. ……『It’s Cheating! (이건 사기야)』30일 오전 2시반 힐튼호텔 한국측 회의실, 재정경제원 최중경 금융협력과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 결국 청와대와 재경원이 두손을 들고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발효한 것은 21일 밤 10시였다.
임규진, 백우진, 이용재, “「IMF 신탁통치」받기까지 막전막후 다큐멘터리 협상—재협상 4차례……결국「白旗(백기)항복」”, 「동아일보」, 1997년 12월 5일
02. 굿바이, 힐튼!
<남산성곽에서 바라본 힐튼 호텔의 정면. 호텔을 설계한 김종성 건축가는 이 형태를 두고 ‘남산을 껴안는다’고 표현했다. ©밀레니엄 힐튼 서울>
1997년 IMF 구제금융 최종 서명, 같은 해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당선시킨 DJP 연합을 이끌어낸 ‘힐튼호텔 담판’. 이 외에도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의 배경이 되었던 밀레티엄 힐튼 서울 호텔이 22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대건설과 이지스 자산운용에 지난 2021년 매각되어 기존 건물은 곧 철거되고, 2027년을 완공을 목표로 오피스와 호텔, 상업시설 등의 복합용도로 신축 예정이다.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다. 건축계에서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제자인 김종성 건축가가 모더니즘 건축을 한국적으로 해석한 작품으로서,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의 배경이 된 현대 건축 유산이자 서울의 랜드마크로서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팬데믹 사태로 서울 시내 다수의 특급호텔들이 폐업 및 매각된 가운데 민간 기업에 적자를 떠안으며 건물의 보존을 강요해서는 안되며, 현재 계획과 마찬가지로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오피스를 포함한 호텔로 신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설계자인 김종성 건축가는 기존 건물의 구조는 유지하며 남산의 반대편으로 용적률을 높이며 증축하는 방안을 제안하며 호텔의 철거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03. 힐튼에 가다
이런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필자 역시 다양한 창구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곳을 방문할 땐 개인적인 욕심으로 마음이 들뜬 상태였다. 김종성 건축가의 작품들은 학창 시절부터 많이 답사하고, 공부하였던 터라 그가 “내가 건축가로 28년 하는 동안 완성도가 제일 높은 게 힐튼이에요”라고 자신있게 언급하였던 작품을 속속들이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
12월 영업 종료를 앞두고 동료 건축인들의 SNS에는 힐튼호텔 방문 인증샷이 올라왔고, ‘나도 늦기 전에 꼭 한 번 가보아야겠다’ 정도의 행복한 결심이었다.
11월의 어느 주말 오후, 차를 세우고 체크인을 위해 로비로 올라갔다. 건물 정면의 메인 출입구를 지나 측면으로 돌아 진입한 주차장에서는 다소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주차장에서 로비로 진입하는 홀부터 널찍하고 화려한 요즘의 호텔과는 다르게, 1980년 대 당시 호텔의 위상을 반영하여 먼저 투숙객을 호텔 로비에 내려주고 운전기사가 주차를 하는 시스템으로 설계된 터라 주차장과 로비를 연결하는 협소한 통로가 다소 어색하게 생각되었다.
< 1983년 힐튼 호텔 완공 당시의 로비. 필자가 찍은 사진 속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연말을 맞아 중앙의 분수가 호텔의 자랑인 마지막 ‘힐튼 기차’로 꾸며진 모습이다. ©밀레니엄 힐튼 서울, 본인 촬영 >
< 지하 2층, 지상 2층, 총 4개 층의 감탄을 자아내는 거대한 규모의 아트리움의 공간 구조가 한 눈에 보이는 힐튼 호텔의 단면도 ©김종성, (주)서울건축 종합건축사사무소 >
이러한 생각은 복도를 지나 메인 로비를 보는 순간 모두 잊혀졌다. 지하 2층 지상 2층, 총 4개 층 규모의 감탄을 자아내는 아트리움은 여행가방을 든 채로 한참을 그곳에 멈추게 만들었다.
기존 대지의 경사를 활용한 이 공간을 김종성 건축가는 ‘가슴을 솟아오르게 하는 익사이팅한 공간’이라 칭한다. 이 공간의 가운데를 차지하는 그랜드 스테어(grand stair)는 로비층과 LL(Lower Lobby, 밀레니엄 힐튼 서울에서는 지하 1층 로비를 칭한다)을 연결하며 호사스러운 환대를 느끼게 한다.
길이 64m, 높이 18m의 거대한 로비는 위아래로 둥글게 감싸져 웅장하면서도 아늑한 공간감을 선사한다. 천창을 통해 은은하게 쏟아지는 빛은 거대한 아트리움을 밝히고, 계단 중앙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그 유명한 ‘힐튼 열차’가 마지막 운행 중이었다. 황동과 목재, 트레버틴이 섬세하게 조합된 베이지 – 골드 – 브라운의 금속과 유리가 만드는 명쾌하고 매끈한 외관과 대비되는 따뜻함이 있었다.
< 밀레니엄 힐튼 메인 로비의 ‘힐튼 히스토리 뮤지엄’. 호텔의 40여 년의 역사가 담겨있다. 마지막까지 슬픈 이별이 아닌 즐거운 여행을 위한 마냥 행복한 공간으로 남아야 하기에 전시 마지막에는 ‘memories last forever(기억은 영원해요)’라는 문구로 분위기를 환기하고 있었다. ©밀레니엄 힐튼 서울, 본인 촬영 >
로비 한 켠에는 마지막 영업을 한달 여 앞두고 그 동안의 역사를 추억하는 전시가 한창이었다. 건물의 첫 삽을 뜰 때부터 공사 막바지의 현장, 개관 직후부터 2015년 객실 리모델링 이후 호텔 내부의 모습을 사진 자료를 통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호텔의 벨보이와 서버들의 복식 변천, 호텔하면 빠질 수 없는 어메니티까지 모두 아카이빙 되어 있었다. 한국 현대사와 함께한 호텔의 역사를 떠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슬픈 이별이 아닌 즐거운 여행을 위한 마냥 행복한 공간으로 남아야 하기에 전시 마지막에는 ‘memories last forever(기억은 영원해요)’라는 문구로 분위기를 환기하고 있었다.
< 이그제큐티브 객실 내부의 모습과 객실에서 보이는 남산 성곽의 풍경. 객실 내부는 오히려 널찍한 느낌이었는데, 어쩌면 창 밖으로 후암동에서 남산 성곽, 회현동까지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본인 촬영 >
객실로 올라가는 길, 풍요로운 로비와는 또 다른 분위기로 낮은 천장이 안락하다. 객실 내부는 오히려 널찍한 느낌이었는데, 어쩌면 창 밖으로 후암동에서 남산 성곽, 회현동까지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내부는 40여 년의 역사에 섬세하게 길들여진 모습이었다. 시그람 빌딩의 커튼월 업체에서 설계하고, 국내에서 제작 및 시공했다는 국내 최초의 알루미늄 커튼월은 투박하지만 견고했다. 오래된 전화기와 빨랫줄에서도 예전 제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세심함이 느껴진다.
< 낮은 층고의 라운지. 아파트보다 낮은 천장이지만 커튼월 너머 보이는 야경을 자리에 앉아서 감상하다보니 아주 아늑한 높이이다. ©본인 촬영 >
라운지로 가본다. 층고가 낮은 느낌이라 재어보니 2,100이다. 오래된 아파트보다 낮은 천장이지만 커튼월 너머 보이는 야경을 자리에 앉아서 감상하다보니 아주 아늑한 높이이다. 걸어다닐 때는 조금 답답하기도 하지만, 휴식을 취할 때는 편안하다. 사람들도 준비된 간단한 음료와 다과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고 창 밖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시간을 보낸다.
< 지하 1층(LL, Lower Lobby)에서 메인 로비(ML, Main Lobby)로 이어지는 계단의 시퀀스. 오르내리며 주변을 돌아보고, 잠시 멈추어 다시 돌아보고, 곱씹어 보게 만드는 공간이다. ©본인 촬영 >
< 메인 로비의 바닥 전체에 사용된 트레버틴. 작은 구멍들에 때가 메워지고 표면이 매끈해지며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돌이다. ©본인 촬영 >
내부를 좀 더 둘러보기로 한다. 연말이면 설치되는 그 유명한 힐튼 열차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러 다시 로비로 향한다. 아트리움을 통해 지하 1층에서 로비층으로 올라간다. 이동을 위한 계단이 아니다. 오르내리며 주변을 돌아보고, 잠시 멈추어 다시 돌아보고, 곱씹어 보게 만드는 계단이다.
일반적으로 그랜드 스테어는 지상1층(ground floor)와 2층을 연결하며 건물에 진입하자마자 손님을 환영하며, 호스트가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힐튼에는 이와 반대로 1층의 메인 로비와 LL층을 연결하며 주출입구의 시선과 동선을 자연스레 지하 1층의 연회장으로 연결한다.
바닥에 깔린 트레버틴이 다양한 재료와 색을 하나로 묶어 그 흐름이 자연스럽다. 작은 구멍들에 때가 메워지고 표면이 매끈해지며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느낄 수 돌이다. 이곳이 사라지면 이 돌들은 더 이상 나이 들지 못하겠구나. 아쉬움에 괜스레 바닥의 돌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04. 가장 쇼킹한 이야기
작년 김종성 건축과와 한 매체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기자는 건축가와 함께 힐튼 호텔 안팎을 거닐며 이곳을 설계하던 당시의 이야기, 그리고 힐튼의 향방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이 건물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쇼킹한 이야기’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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